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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sr PICK] 한강 작가 작품 읽기 _ 희랍어 시간(간단 리뷰)

orsr 2024. 11. 16. 22:48

사실 리뷰를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많이 망설인 작품, 희랍어 시간.
망설인 이유는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잘 알 수가 없어서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에도 이 정적인 소설을 어찌해야 하는가 싶었지만 내가 이해한 만큼만 리뷰해보기로 했다.
 


출판 : 문학동네
발행 : 2011.11.10
책 소개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열일곱 살 겨울, 여자는 어떤 원인이나 전조 없이 말을 잃는다.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을 다시 움직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다시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를 선택한다. 그곳에서 만난 희랍어 강사와 여자는 침묵을 사이에 놓고 더듬더듬 대화한다. 한편, 가족을 모두 독일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지만 그녀의 단단한 침묵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우리가 주로 아는 남자와 여자가 인연을 맺게 되면 그 서사를 그려낼 때 서로의 첫 만남부터 서서히 서로를 알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희랍어 시간 자체는 이와 다르게 남자의 서사가 있고, 여자의 서사가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떠한 사건으로 접점을 가지며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서로 어떠한 관계와 사랑을 꽃피우는 단계를 그리는 그런 소설이 아닌 거다. 
 
책 소개에 나오듯이 남자는 시력을 점점 일어 간다. 그는 열입곱부터 독일에 살았던 그는 유전병으로 인해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그의 아버지는 시력을 잃어가는 동안 방황을 하며 가족들에게서 떠나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자는 청소년기에 실어증을 겪은 적이 있다. 이를 불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극복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 과정에서 양육권까지 잃자 또 한 번 실어증을 겪게 된다. 그녀는 희랍어를 새로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희랍어 강사가 바로 남자인 것이다.
 
권희철 해설에 의하면 한강 작가는 자신의 일련의 작업들이 일종의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작품의 모호한 부분을 의미심장하게 치장하려는 진부한 시도가 아니고, 작가가 각 작품에 대응시키고 있는 질문들의 해당 작품들을 작동시키는 동력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질문에 해결책으로서의 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그 자체로 충분히 숙고하며 사유하고 또 다른 질문이 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희랍어 시간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볼 때 그것이 가능한가.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 잠겨있는 여자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잃게 되리라고 예감하면서도 세계의 그 덧없는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남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말을 회복하고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심해로부터 삶의 뭍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작품은 끝난다.
 
아슬아슬한 삶의 가능성은 언제나 허물어질 듯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은 무엇으로도 해결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죽음충동처럼 언제든 다시 찾아와 그녀에게서 말을 뺴앗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오히려 말을 통해 연결된 삶과 세계에서 고통을 느끼며 반대로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가 '숲'이라는 말을 발음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고 대지에 정착한 것은 아니며 언제고 다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심해로 빨려들어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희랍어 시간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이해는 어떤 방법으로 삶을 수락하고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침묵과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된 질문을 보존하게 한다. 답을 내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랍어 시간은 글 속에 정적과 침묵이 많이 느껴진다. 
글을 읽고 있지만 왠지 그 조용함 속에 집중하게 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경험을 가지게 한다.
예쁜 문장인데 왜이리 조용한 기운이 드는 것인지 신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언어를 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한 결여는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이 비언어적인 요소인 접촉을 통해서 서로 연결된다.
여자는 말을 할 수 없지만 넘어진 그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에게 필수요소인 안경이 망가졌고 이를 고치러 안경점에 가야하지만 그들은 나가지 않고 함께 있으며 서로를 알아가며 치유의 과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들은 연계시킨 것은 이제 더 이상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어가 된 '희랍어'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침묵이라는 요소가 불통이 아닌 소통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장벽을 느끼곤 한다.
나만 왜 이럴까.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그 자리에 서 있고 모두가 나아가고 있는가.
누군가는 말을 잃었고, 누군가는 시력을 잃어가고, 나는 또 무엇을 삶에서 잃었는가.
잃은 것으로 인해서 주저앉아 버릴 것인가. 
아니면 또 움직여 볼 것인가.
어떻게 삶을 살아내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