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일 : 2024년 2월 9일
장르 : 스릴러, 범죄, 수사, 액션, 서스펜스, 느와르, 드라마, 블랙 코미디, 다크 히어로, 피카레스크
회차 : 8부작
제작사 : 쇼박스, 렛츠필름
연출 : 이창희
극본 : 김다민
원작 : 꼬마비의 네이버 웹툰 《살인자ㅇ난감》
출연 : 최우식, 손석구, 김요한 外
명절 시작과 맞춰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o난감. 스릴러 범죄 드라마인데 배우 손석구 님이 나온다는 소식에 작품이 궁금해졌고, 보기 시작한 드라마. 개인적으로 손석구 님이 출연한 범죄도시 2를 정말 재미있게 본 기억에 왠지 믿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의 스토리는 어쩐지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이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학창시절 소위 일진이라는 질 나쁜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찌질한 구석이 있는 이탕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창시절의 찌질함을 가진 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일상을 보낸다.
나름 소소한 계획이라면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어한다는 점 정도?
평범하고 조용한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탕'의 평범한 삶이 180도 바뀌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살인'을 저질러 버린 것.
이를 계기로 이탕은 더 이상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죽이고 보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다
첫번째로 일어난 우발적 살인. 그리고 목격자이자 협박인물에 가해진 2차 살인.
두 번의 살인을 하고 이탕은 이를 들킬까 불안한 나날들에 시달린다.
최우식 배우는 이런 부분의 이런 감정표현 참 특화된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이탕의 살인 증거는 우연 속에 사라져 버리게 되고.
오히려 살해 피해자들이 엄청난 범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첫번째는 연쇄 살인범,
두번째는 보험금을 노린 친족 살해.
사회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목들의 인간들이었으나, 죄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탕에게 살해당한 것.
너무나 서투른 범죄 행위지만,
증거는 남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두번째 살인에서 증거가 남지 않는 부분은 고어물 처럼 느껴져서 속이 아주 메스꺼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탕을 쫓는 형사 장난감(손석구)
증거가 없지만 이탕(최우식)을 보며 직감적으로 그가 사건과 크게 연루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이탕의 누가봐도 죄지은 강아지 표정을 보면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
특히나 매 범죄현장과 연관된 장소에 있는 이탕(최우식)에 더더욱 심증이 커져간다.
저는 이게 다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랑 만약에 같이 한 팀이 된다고 하면 아마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다크히어로의 탄생
이탕(최우식)의 우발적 살인들은 노빈(김요한)을 통해서 계획적으로 변해간다. 노빈은 사이드킥 _ 영웅의 조수역을 자처하면서 그의 범죄를 돕는다. 정의구현이라는 그 나름의 목적을 내세워 이탕과 세상을 바꿔보고자 한다.
나랑 어디 좀 가자. 내가 너랑 할 얘기가 많다. 둘이서만
이 드라마에서 극을 확실하게 끌어가주는 역은 아무래도 송촌(이희준)이다. 노빈이 과거에 함께 정의구현을 도모했던 구 동료이자 작은 범죄에도 무자비한 벌을 내리는 현 빌런 송촌.
노빈과 함께 하는 이탕에게 접근하는데, 나쁜 놈 판별기 이탕은 그의 위험성을 알아채고 도망친다.
정의로운 살인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이 작품이 공개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배우들도 있지만, 현재 사회에 일어나는 범죄들에 대한 솜방망이 수준의 처벌들에 이미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 피해자가 되고, 국가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장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다. 범죄자도 사람이니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인권주의는 어느새 피해자들만 바보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의'를 내세운 연쇄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게 궁금하거든,응? 너는 기준이 뭐냐.
나는 그게 영 헷갈리거든.
그, 죽일 놈 선별하는 거. 이게 갈수록 더 헷갈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을 정의라고 한다. 정의의 개념은 다양하여 학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정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은 평등,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하였으며, 고대 로마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규정하였다.
현대 철학자 중에서 정의론을 가장 잘 정립한 사람은 철학자인 롤스이다. 그는 정의에 관한 다음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①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광범한 자유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제1원칙).
②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배정되어야 한다. ㉠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고, ㉡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도록 하여야 한다(제2원칙).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법학에서 정의 :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 학문이 법학이기에, 법학자들은 어떻게 정의구현을 이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 고민의 결론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가해자에게 처벌을 줘서 정의를 구현하는 응보적 정의다. 즉, 가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학폭위가 열리면 가해자가 누구인지 결정하고 징계를 내린다.
그러나 응보적 정의는 (최종) 목적이 '잘못한 사람 벌 주기'이기 때문에, 막상 그 벌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죗값을 치루게 하기 위해서', '죄의 무거움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붙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고통=죗값이 되는 건지, 고통을 받으면 정말 죄의 무거움을 깨닫는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찰하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
또한, 응보적 정의에서 피해자는 외면당한다. 앞선 학폭위를 예시로 들면, 가해자의 징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만 정작 피해자의 상처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이며, 어떻게 위로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지 않는 갈등 상황도 많다.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일어났거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심한 욕설을 해서 가해자가 주먹을 휘두른 경우에는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분명히 할 수가 없다. 만약 응보적 정의의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린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응보적 정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처벌만 받지 않기 위해 법을 공부하면서 위법하지 않게 공격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꺾고 꺾이는 힘에 순응할 뿐 자발적인 책임감을 배우지 못해 힘의 지배 논리를 익히게 된다. 또한 피해자는 고통을 위로받을 방법이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엄벌주의를 외치게 되지만, 정작 가해자가 엄벌을 받아도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응보적 정의는 처벌적 사고와 연결되면서 "내 기준과 맞지 않으면 응당한 처벌을 내린다"는 위험한 사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실,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의 대부분은 이러한 응보적 정의-처벌적 사고로 인해 일어난다. 심리적 성숙도가 높은 사람들은 처벌적 사고가 되려 낮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정의감이 낮은 것인가? 사실, 이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관이 바로 '회복적 정의'다.
회복적 정의란, 갈등 당사자들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다. 피해자는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를 받으면서 위로를 받아 '회복'하고,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받게 되면서 비틀린 행동과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져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가 듣게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직접 듣게 하는 겁니다. 사실 가해자는 이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내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걸 가해자가 느끼게 하는 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감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 박숙영 회복적생활교육센터장
특히 피해자가 트라우마에서 회복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해자에게 공감받는 것'이기에, 회복적 정의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나게 해서 대화시킨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체로 인식시키고, 감정이 있는 존재임을 체감시키고,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가 느꼈을 때 비로소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여 진실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하게 된다.
가해자가 안하무인하게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폭력 현장에서도 피해자를 무시했는데,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우선, 폭력 현장에서는 피해자가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한다. 목소리를 내면 가해자가 불편해져서 입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그리고 가해자가 오롯이 피해자의 말을 듣는 시간을 갖게 한다면, 가해자는 그토록 외면하려고 입을 막아왔던 피해자의 고통을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때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 회복적 정의이다.
만약 가해자가 그래도 고통을 무시한다면, 이때는 가해자가 감정 접촉이 안 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감정 접촉이란 쉽게 말해서 "내 감정을 내가 아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보고 덩달아 고통스러운 나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감정을 자각시키기 위해 가해자 상담이 들어간다.
여기까지 온 후에야 처벌을 논할 수 있다. 이 이전 단계에서, '저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벌을 받아봤자 하나마나다. 처벌은 필수, 목적이 아니라 '선택'이며, 가해자가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충분히 위로를 받았고 다른 방식으로 가해자가 죄의 무거움을 깨달았다면, 때로는 기꺼이 처벌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온정주의나 용서, 화해를 추구하는 정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용서와 화해는 피해자의 몫이며, 정의가 제안, 추구, 목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만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정의관을 택하는 것이지, 가해자에게 온정을 베푼다고 해석하는 것도 그다지 맞지 않는다.
출처 : 나무위키
정의에 대한 개념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왜 살인자ㅇ난감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탕과 송촌에 벌어지는 살인들은 정의의 의미 중에서도 응보적 정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해자 처벌에 중점을 둔 응보적 정의는 피해자의 외면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어떤 사건사고의 해결의 중심에는 피해자가 꼭 존재해야한다. 피해자의 상처 회복이 정의 실현에서 빠진다면 그건 반쪽짜리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온정주의, 무조건적 용서와 화해와는 다른 개념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 피해자의 상처 회복 두 가지 모두가 구현되어야 법적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드라마에서 이탕이 살인자라는 유일한 증거이자, 작품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 <죄와 벌>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으로 1867년 단행본으로 초판이 출간되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드라마의 이탕처럼 우연한 계기로 라스콜리니코프를 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논리를 세워 살인을 정당화한다. ("그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아주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한 이를")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지만 누구보다 순결한 소냐를 만나면서 혼란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작품은 살인 이후 겪게되는 심리적 압박감와 죄책감을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와 참 비슷한 결이다)
작품의 공통점을 추가하자면, 드라마와 소설 속 배경이 인간의 가치와 진실이 소외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는 위대한 인간이 하찮은 인간을 죽일 권리를 갖는다는 비정상적인 이념을 갖게 되고 (위대한 인간과 하찮은 인간을 가르는 기준도 제시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는 사상과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연과 감정에 저지른 살인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이고 의식과 이성에 따라 행동해왔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보면 우리는 무의식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 비합리적인 존재인 것이다.
정리하며..
사적 제재를 통한 정의 실현을 말하는 작품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옛날옛적 일본 만화 <데스노트>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작품들 <국민사형투표> , <비질란테> 등이 있다. 이런 작품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들이 너무 많은데 이에 대해서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들끼리 서로를 혐오하는 사회. 그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분노만 커져가고 있다. 정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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